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 카렌 바라드의 세계 이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단순히 독립된 사물들의 모음일까요, 아니면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새롭게 생성되는 것일까요?
페미니스트 이론가이자 물리학자인 카렌 바라드(Karen Barad)는 이에 대해 독창적인 답을 내놓습니다. 바로 행위적 실재론(Agential Realism)입니다. 이 개념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윤리를 새롭게 바라보게 하며, 우리가 세계와 맺는 관계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만듭니다.
행위적 실재론의 배경
바라드는 양자물리학(특히 닐스 보어의 철학), 페미니즘 이론, 포스트휴머니즘을 통합하여 기존의 이분법적 사고를 비판합니다.
전통적 철학과 과학은 흔히 다음과 같은 구분을 전제했습니다.
- 주체 vs 객체
- 자연 vs 문화
- 인간 vs 비인간
- 이론 vs 실천
하지만 바라드는 이러한 구분이 실제 세계를 올바르게 설명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핵심 개념: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세계
1. 내부-작용(Intra-action)
행위적 실재론의 핵심은 내부-작용 개념입니다.
- 전통적 상호작용(interaction): 이미 존재하는 개체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
- 내부-작용(intra-action): 개체들은 원래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함께 생성된다.
즉, 관계가 먼저이고, 개체는 그 관계 속에서 드러나게 됩니다.
2. 현상(Phenomena)
세계의 기본 단위는 독립적인 사물이 아니라 관계적 사건인 현상입니다.
3. 얽힘(Entanglement)
현실은 본질적으로 얽혀 있으며, 주체와 객체,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는 본래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특정한 관계와 실천 속에서 만들어집니다.
4. 장치(Apparatus)
언어, 실험 도구, 담론 같은 장치는 현실을 관찰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현실을 구성하는 역할을 합니다.
5. 행위성(Agency)
행위성은 인간의 고유한 소유물이 아닙니다. 물질 자체도 행위성을 지니며, 이는 관계 속에 분산(distributed)되어 나타납니다.
예시: 전자의 위치 측정
전자를 측정할 때를 생각해봅시다.
- 고전적 관점: 전자는 측정 이전에도 특정 위치를 이미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단순히 확인할 뿐이다.
- 행위적 실재론: 전자의 위치는 측정 장치와 상황과의 얽힘 속에서 생성된다. 즉, 전자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 이전에, 관계와 실천 속에서만 의미 있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됩니다.
행위적 실재론의 의미와 함의
- 과학과 철학
과학은 단순히 객관적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과 담론 속에서 현실을 공동 생산합니다. - 윤리적 책임
우리는 세계와 얽혀 있기 때문에, 특정한 현실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책임이 따릅니다. - 포스트휴머니즘
인간 중심적 사고를 넘어, 인간과 비인간, 물질과 의미가 함께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통찰을 제공합니다.
행위적 실재론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뒤흔듭니다.
세상은 단순히 ‘이미 존재하는 것’을 관찰하는 무대가 아니라, 관계와 얽힘 속에서 끊임없이 생성되는 과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계 속에서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현실을 함께 만들어내는 공동 행위자입니다. 이 깨달음은 과학과 철학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일상의 선택과 윤리에까지 중요한 울림을 줍니다.